Life Logging


헤어질 결심

04/06/2023
3개월 간 쓰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 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고 간혹 실행에 옮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필요가 있다' 라고 판정을 받아 계속 살아남은 물건이 있으니 바로 HP Pavilion G9 노트북이 그것이다. CPU는 펜티엄이고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된 지 오래라 전원이 연결되지 않으면 켜지지도 않는 형편이다만 오로지 CD-ROM이 달려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생명이 계속 연장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음악 CD를 ripping하기 위해서는 남겨 둬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래도 쓰지 않는 물건이 자리만 차지하니 계속 눈에 거슬렸고 몇 해가 지났다. 그 동안 처리해 버려려고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그때 마다 그놈의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애꿎은 윈도 업데이트나 돌리고 다시 넣어준 게 반복되었다.

어제, 드디어 결심이 섰다. '헤어질 결심' 이라는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새롭게 들어온 책을 놓고 싶은데 선반을 차지하고 있는 노트북을 보니 오늘은 더 이상 미루지 않겠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하니 음악 CD를 ripping해서 mp3로 만든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아니 대체 새 음악 CD를 산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버리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혹시 개인정보 남은 게 있을까 다시 전원을 연결하고 켜 본다. 직전 켜 봤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끗하게 포맷이 되어 있고 윈도우 IP/PW도 단순하게 바꿔놓아서 누가 봐도 처분하려 손을 본 태가 난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터라 온갖 ID/PW를 넣어보는 등 로그인하느라 진을 뺀다.

속이 시원해졌다. 이렇게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습관을 하나 또 벗어 던졌다. 옛 말에 사람이 세속의 인연과 집착을 버리면 능히 우화등선 할 것이다 란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과거와 하나씩 이별하다 보니 날개는 모르겠고 조금은 속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다.

인터넷 방송인이 참여자와 대화하면서 "요즘엔 mp3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라고 깜짝 놀라면서 "자기도 나이가 많아져서 세상에 뒤떨어졌나 봐요." 라고 자조하는 말을 하는 걸 봤다.
그래,
음악을 디지털로 변환해서 진동과 긁힘에 강한 광학 매체에 저장하면, 걸핏하면 휘어지는 LP나 몇 번 듣다 보면 늘어져서 소리가 뭉개지는 카세트 테이프와는 다르게 '반 영구적으로 소장'이 가능하다.
는 이야기는 네트워크를 통해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요즘시대의 관점에서 볼때,
다 좋은데 대체 왜 '저장'이라는 걸 해야 하냐
는 근원적이고 존재론적 의문이 들면서,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흘러간 유행가의 한 소절을 반복해서 흥얼거리는 소음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